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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11/04 길고양이의 삶을 살다

2008년 11월 2일 일요일

나는 몇 시간 후 가출을 단행할 것이다. 여기서 쓰인 '가출'이라는 단어는 정확하게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친구를 한 명 만들어 그 친구와 있지도 않은 저녁 약속을 이유로 집을 빠져나가 거리를 돌아다니며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조그마한 카페 같은 곳에 틀어박혀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아무튼 별다른 일을 하지 않고 몇시간 정도 노닥거리다 들어오는 행위'를 뜻한다. 벌써 읽을 책도 골라놓았다.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이나 폴 오스터의 <뉴욕 3부작>을 들고 나가, 내키는 대로 둘 중 하나를 골라 읽거나 여유가 된다면 둘 다 읽고 들어올 생각이다. 그 몇 시간 동안 다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대신 내가 치러야 할 것은 폭리일 것이 뻔한 -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저개발 국가 어린이들의 피와 땀이 서린, 가혹한 노동 착취의 결과물일 것이 뻔한 - 최소 몇 천원의 커피 정도가 될 것이다. 단지 자리를 얻기 위해 돈을 지불할 뿐, 결코 입에도 대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에 좀 아깝고 속이 쓰리긴 하지만 괜찮다, 지금 나에게는 그 몇 천원보다 혼자 있을 시간이 절실히 필요하다. 그러니까 인기리에 종영된 드라마 '엄마가 뿔났다'에서의 김혜자씨처럼 '휴가를 주세요!'라고 당당히 외칠 처지는 못 되지만 나도 나에게 쉴 시간 정도는 좀 주어도 되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했다.

한국에 돌아오기 전 했던, 내가 과연 가족들과 잘 어울려 생활해 나갈 수 있을까 하는 태산같은 걱정들을 보란듯이 뒤엎고 요즘 나는 겉으로 본다면 아주 성공적으로 가족의 일원으로 다시금 편입되어 어디 하나 나무랄 데 없이 바르고 정확한 삶을 살고 있다. 누가 시킨 건 아니지만 단지 아침 늦게까지 이부자리에서 비비적대고 있는 것이 싫어 새벽 다섯시, 어쩌다 늦잠을 잔다고 해도 여섯시만 되면 일어나 아침밥을 하고 가족들의 식사를 챙긴 후 운동을 하고, 집에 와서 점심을 먹고 약간의 시간을 보내다 학생들을 가르치러 간다. 이런 나날들이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계속되고, 일요일은 그나마 저녁시간에 수업이 없으므로 가끔 주말 연속극을 보기도 한다. 아, 내가 가르치던 남학생 녀석 하나가 질풍 노도의 시기를 통과하고 있는 터라 결국 수업을 그만두었기 때문에 앞으로 수요일과 토요일에도 수업을 가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대신 지갑은 좀 빈곤해졌다). 부모님, 특히 엄마는 '갑자기 철이 들어 온 딸'의 가족 편입을 두 손 들어 환영해 주신다. 요즘 우리 가족들의 생활은 점점 더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물질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그리고 나 역시, 성공적으로 가족의 일원이라는 역할 수행을 하고 있는 내 자신이 기특하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하고, 가족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에 감사해 하기도 하고 일종의 성취감이랄까 하는 것 까지 느끼고 있다. 그렇게, 지금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같아 보였다.

그러나 결코 나는 '철이 들어온 것'이 아니다. 그저 의무에 따라서 충실히 역할극을 하고 있을 뿐, 오히려 더욱 더 미숙한 인간이 되어가고 있다. 어제 오늘 평소에 별로 좋아하지도 않던 음식들을 나도 모르게 마구 주워 먹다 기분이 나빠져 모두 게워내 버리는 만행을 되풀이 하고서야 그 사실을 겨우 깨닫게 되었다. 태생적으로 나는 타인 - 설령 그것이 피를 나눈 가족이라 할 지라도 - 과 함께 살도록 고안된 생물이 아니다. 혼자 있으면 외로움에 사무쳐 못견디게 주위 사람들을 못살게 구는 생물이긴 하지만, 그래도 혼자 있는 시간이 충분히 주어져야지만 적어도 '나 자신'이라는 존재를 지킬 수 있도록 만들어진 개체다. 그러나 지금처럼 내 생활의 대부분이 타인들과의 시간과 관계, 특히나 어떠한 역할과 거기에 기대되어지는 의무 따위에 얽매여 있는 상황이 되면, 결국 무척이나 힘들고 지치고 자칫 잘못하면 스스로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나에게는 내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 누구에게도 관찰되거나 간섭받지 않고 온전히 혼자서, 차라리 외로움에 사무쳐 몸부림 치거나 고함치거나 울부짖을 수 있는 그런 시간과 공간이. 철썩같이 내 장래와 미래에 기대를 걸고 아낌없이 후원해 주시는 부모님과 사랑하는 가족, 친지들, 그리고 친구들에게는 정말로 미안한 이야기지만 - 그리고 나는 사실 그들을 무척이나 사랑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주었으면 한다 - 가끔은 정말로 그러하다. 그러니까 나는 오늘 마시지도 않을 커피에 대한 값을 치러가면서라도 가출을 해야겠다. 오늘이라도 꼭 좀 그렇게 해야겠다.

얼마 전 부터 학생들을 가르치러 가는 길목에서 손바닥만한 아기 길고양이와 종종 마주친다. 얼룩덜룩 누런 털에 흰 양말을 신고, 동그란 눈이 도드라져 조금은 애처로워 보이는 녀석이다. 원체 고양이가 추위에 강한 동물이라고는 하지만 부쩍 하루가 다르게 쌀쌀해지는 아침 저녁 바람에 고 조그만 몸이 괜찮을까 싶어 뭔가 먹을 것이라도 좀 먹여 보내고 싶은 마음에 손을 내밀어 보지만, 그 녀석은 사람이 무서운 건지 싫은 건지 아무튼 언제나 내민 내 손이 무안하게스리 휙 돌아서 자기 갈 길을 가 버린다. 그러한 나날들이 하루 이틀 되풀이되다 보니 그래, 곧 얼어죽어도 곁불은 쬐지 않는 것이 너의 신조라면 너 좋을대로 하렴, 하는 체념 비슷한 감정마저 느끼며 한 때 '고양이과 인간'이 되리라 다짐했던 시간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아직 100% 그 다짐을 실행할 처지는 아니지만 오늘같은 날 하루 정도는 앞뒤 재지 않고 단 몇 시간 만이라도, 그 길고양이와 같은 고립된 시간을 즐겨 보는 것도 그리 염치 없는 일만은 아닌 것 같다. 그러니까 오늘 단 몇시간 만이라도 길고양이의 삶을 좀 살아봐야지.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는 엄마가 보고싶어했던 영화 한 편을 빌려서 들어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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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04 13:30 2008/11/04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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