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다리에 닿는 바람은 좀 쌀쌀했으나 늦가을이라고 해야 할지 초겨울이라고 해야 할지 헷갈리는 날씨 치고는 꽤나 포근한 편이었다. 덕분에 평일 낮임에도 불구하고 관악산 어귀에는 제법 등산객들이 모였다. 자기 손녀딸이 이번에 대학에 들어가서 그런지 아가씨 또래의 손님들한테는 이천원어치 줄 것을 그만 사천원어치, 오천원어치씩 퍼주고 만다고 하시며 고구마를 봉지 그득하게 담아주시던 할머니의 좌판에도 드문드문 빈자리가 보이는 것을 보니 오늘 하루 장사가 그리 나쁘지는 않았던 모양이라 괜스레 마음이 든든했다. 아차, 이렇게 넋 놓고 구경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예정에 없던 술자리에 참석해 새벽까지 진탕 놀았던 탓에 나는 이틀째 정장차림 그대로였다. 얼른 집에 가서 옷이나 좀 갈아입어야지 하는 생각으로 머리속이 가득 차서 발걸음이 갑자기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름 열심히 다리를 움직이던 내가 관악산 입구를 돌아 고속순환도로인지 뭣인지 하는 공사장 어귀에서 본 것은, 어느 할아버지 한 분이 벤치에 앉아서 담배연기를 내뿜고 계시는 모습이었다 - 그랬는데, 하고많은 사람 중 그 할아버지의 모습이 유독 내 눈에 들어온 것을 보니 바삐 지나가는 와중에도 뭔가 단순히 앉아있는 사람의 모습이라고 설명하기에는 어려운 위화감 같은 것을 느꼈던지 나는 굳이 고개를 돌려 그 할아버지의 앉은 모습을 재차 확인하고야 말았다. 그리고 눈에 들어온 것은 한 줄기 기다란 오줌줄기. 아, 그 할아버지는 벤치에 앉아 한 손에는 담배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지퍼를 열어 앉은자리에서 오줌을 누고 계셨던 거다. 아마도 오줌줄기를 내 뿜고 있는, 희끄무레하게 보이는 저 살점은, 그래, 그런 것이겠지.

그래, 그런 것이겠지, 그 장면을 맞닥뜨린 순간의 내 심정을 표현하는 데 이 이상의, 이 이하의 표현도 필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 위에서 지퍼를 열고 성기를 드러내고 오줌을 누고 있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놀랍다고, 공포스럽다고, 폭력적이라고, 그렇다고 불경스럽다고 느끼지도 않는 내 자신을, 아니 고백하자면 순간 10년 쯤은 갑자기 늙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되어 그 할아버지를 측은하다고 느꼈던 내 자신을 깨닫는 순간의 그 심정이 놀랍다면 놀라운 것이고 복잡하다면 백만배는 더 복잡한 것이었다. 퍼뜩 든 생각이 - 어째서 나는 그 할아버지를 보며 다른 어떤 기분을 느끼지 않고, 하고 많은 기분들과 감정들 중에서 왜 하필이면 측은하다는 생각을 했을까. 옛날 옛적에 맹자는 인간의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착한 마음씨 중 하나로 측은지심(惻隱之心)을 꼽았다고는 하나, '측은'이라는 말을 풀어보면 곧 '남을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이라는 뜻이 된다는데, 과연 내가 느낀 측은함이 인간의 착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그 측은함이었던 걸까, 아니 애초에, 내가 무엇 하나 잘난 것이 있어서 저 할아버지를 보며 감히, 측은하다는 마음을 품는 걸까. 과연 내 검디 검은 마음 속에서 무슨 생각이 떠올랐기에.

일본에 있을 때 후지와라 마사히코의 <국가의 품격>을 읽으면서, 이 문제작이 영어로 번역되면서 '품격'이라는 말이 'dignity'라는 단어로 번역되었다는 것을 가지고 수업시간에 토론을 한적이 있었다. 당시의 토론 - 다시 말해 '자국중심주의를 바탕으로 한, 꽤나 차별적인 의미를 다분히 가지고 있는 맥락에서의 품격'이라는 말이 dignity라는 단어로 번역되는 게 옳으냐 아니냐 하는 것에 대한 - 이 어떤 식으로 마무리되었는지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여하튼 그러한 번역이 버젓이 통용되고 있는 것을 보니 세상에는 '품격 = dignity'라는 수식에 동의하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이다, 하고 쓴 웃음을 지었던 일도 어렴풋이 떠오른다. 그런데 그랬던 내가, 그 할아버지를 보고 다름 아닌 측은함을 느끼지 않았던가. 하필이면, 왜, 측은함이었을까. 적어도, 의식있는 인간으로서 나는, 남들 보는 앞에서 밑을 훤히 드러내 보이지 않고 볼일을 해결하지는 않는다는 정신머리, 다른 말로 하면 일말의 '품격' 정도는 가지고 있다는 알량한 우월감 때문이었을까.

아아, 적어도 그 할아버지를 보기 전 까지는 그래도, 조금은 내 스스로를 다시 좋아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살짝 들떠 있었는데. 다시금 슬퍼졌다. 이건 약간 쌀쌀한 날씨 탓도, 머리를 탕탕 울리는 공사장의 소음 탓도, 나를 툭툭 치고 지나가는 등산객들 탓도,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에서 노상방뇨를 하는 할아버지의 탓도 아니다. 전부 나 때문이다. 남들보다 자신이 조금 더 위에 있다고 생각하며 그 약간의 우월감이 주는 쾌감을 아무런 저항 없이 있는 그대로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은, 전부, 내 탓이다. 나는 내 자신이 다시 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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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29 19:48 2009/11/29 19:48
daily life l 2009/11/29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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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likeablue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 자신이 다시 미워졌다" 같은 말 좀 자꾸 하지 말어라~

    2009/12/01 01:00
    • 飛정상 2009/12/01 21:40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것 말고 다른 어떤 말로 그 심정을 표현할 수 있겠어. 하지만 응, 이제부터는 정말 좀 자제할게, 미안.

  2. 339방랑자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도 내가 미워졌다. 하지만 떡은 먹을 것이다

    2009/12/04 04:35
  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네 글 읽다보니 관악산 입구 좌판, 녹두골목, 신림동시장 같은 복닥복닥 촌스런 듯 사람냄새 나는 장소들이 되게 그립다. DC는 가끔 여의도같아, 양복입고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건물들 사이로 우르르 바삐 지나다니는. 그나저나, 니가 아무리 열심히 너 자신을 미워해봤자 결국은 너를 좋아하는 사람이 더 많으니 다 소용없고 부질없어 포기해 넌 우릴 이길수업써! ㅋㅋ

    2009/12/12 14:34
    • 飛정상 2009/12/29 02:48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런 DC도 역시 사람사는 곳이겠지, 그리고 그 곳에서 너는 언제나처럼 열심히 하고 있을테고. 아아, 나는 잔뜩 삐뚤어져서 요새 매일 민주 괴롭히는 재미에 살고 있단다. 아무래도 난 애정이 좀 더 필요한가봐. 애도 아닌데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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