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측못할 문제를 잘 내주시기로 유명한 어느 선생님의 시험에, 한 번은 자신의 "지적 첫사랑"을 쓰라는 문제가 나온 적이 있었다 한다. 아마 당시의 내가 그 문제에 대한 답을 써내려가야 할 입장이었다면 나는 한참동안이나 고민했을거다. 최악의 경우엔 그 문제를 풀어내지 못했을 지도 모르겠다(이래서야, 매천야록이니 윤치호 일기니 서유견문이니 독립정신이니 하는 걸 잔뜩 안겨주신 그 어떤 선생님을 뵐 면목이 없어질지도 모르겠다). 공부를 하면서 회자되는 여러가지 이야기들에 대한 흥미가 생긴 적이 있어도 그것이 그 이야기를 만들어 낸 인간 자체에 대한 흥미와 호기심으로 발전한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모든 학문은 곧 인간에 대한 궁금증으로 귀결될진대, 이런걸 보면 참, 공부 허투루 했다는 생각이 부쩍부쩍 나게 마련이다.

만약 내가 지금 다시 그 문제를 받아들게 된다면, 이젠 뭔가 끄적여 볼 법도 하다. 인간 그 자체로 흥미가가 가는 사람을 찾았기 때문이다. Niccolo Machiavelli, 통칭 마키아벨리라 부르는 이가 바로 그 사람이다. 부끄럽게도 시험기간에 쫓겨서야 비로소 수박 겉핥기로 접하게 된 인물이지만, 이 사람을 대하게 될 때면 그의 저작 너머에 있는 마키아벨리라는 인간 자체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난다. 어째서 그가 이렇게나 내 관심을 끄는지는 도저히 스스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게 나 자신도 이상하다. 어쩌면 하나의 거대한 비극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의 삶의 파편들 중에서 내 모습의 일부분을 비춰보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내가 먼저 그를 저버릴지언정, 그가 나를 먼저 저버릴 염려는 없다는 것이다. '소년은 늙기 쉽고 학문은 이루기 어려우니 짧은 시간도 가벼이 여기지 말라'지만 적어도 6세기나 먼저 삼도천을 건넌 인물이 까짓 사람 하나 늙는 것 못 기다려주랴 싶기도 하다.

그가 이때 취한 방법은 음미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요, 또한 남이 본받을 만한 것이기에 저도 그냥 지나치고 싶지가 않습니다. 보르자가 로마냐를 점령했을 때 그곳은 나약한 영주들에 의하여 통치되고 있었는데, 이들은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백성을 수탈하는 것이어서 그들이 통일을 이룩할 수 있는 계기를 주기는커녕 분열을 일으킬 수 있는 계기를 줌으로써 전 국토는 도적과 폭력과 각종 불법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그는 알아챘습니다. 따라서 이곳을 평화롭게 하고 왕의 군사에 복종하게 하려면 이 지방의 행정을 훌륭하게 바로잡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그는 판단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레미로 데오르코(Remirro de Orco)라고 하는 잔인하고도 용맹한 사람에게 비상 대권을 주어 그리로 파견하였습니다. 레미로는 짧은 시간 안에 그 지역을 평화롭고도 통일된 지역으로 만듦으로써 좋은 평판을 얻었습니다.
그렇게 되자 보르자는 그와 같은 대권이 이제는 더 이상 필요치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대권은 증오심으로 변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그 지역의 중심부에 민간 법정을 세워 탁월한 재판장을 두었으며, 각 도시는 그곳으로 각기의 변호사를 보내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지난날 너무 엄하게 다스려 그곳의 백성들이 다소 증오심을 품고 있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보르자는, 만약 그때 잔혹한 정치가 베풀어졌다면 그것은 자신의 본의가 아니요, 당시 행정관의 거친 성격 때문이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민중의 마음을 풀어주고 그들이 자신에게 집중하도록 만들리라고 결심했습니다. 드디어 그 기회가 왔습니다. 어느 날 아침 보르자는 레미로를 체세나 광장으로 끌어내어 두 토막을 낸 다음 나뭇잎 한 조각과 피 묻은 칼과 함께 내걸었습니다. 이 끔찍한 모습을 보자 민중은 만족해했으나 한편으로는 두려워하기도 했습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중 가장 좋아하는 대목.
처음 읽었을 땐 온 몸에 전율이 퍼지면서 무릎을 탁 쳤다.

시험 끝나면 리돌피의 전기나 읽어야겠다.

참, 그 유명한 어느 선생님의 지적 첫사랑은 루소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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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a1t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피묻은 칼은 그렇다치고 나뭇잎 한 조각은 무슨 의미였을까요?
    권력이란 게 참으로 두렵단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해주네요.

    2006/10/23 09:32
  2. 캐스톨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지적 첫사랑, 몇몇 떠오르는 인물이 있긴 하지만 첫사랑이라 불릴만한 것이었는지 의문이 들어요. 그저 훌륭한 인물에 대한 동경 정도가 아니었을지..
    시간을 두고 곱씹어 봐야겠네요 ^^ 나중에 '아, 그것이 첫사랑이었구나!' 라고 떠오르거나(..) 정말이지 첫사랑을 만나게 되면 트랙백 해드릴게요 :D
    (그 날이 언제쯤일런지..)

    2006/10/23 14:02
    • 飛정상 2006/10/25 05:17  댓글주소  수정/삭제

      첫사랑이 뭐 거창한 거겠습니까. 지나고 나면 그것이 사랑이었나 싶을 정도로 풋풋한 느낌을 풍기는 사랑도 있지 않습니까. 너무 부담갖지 마시고 얼른 트랙백 쏴 주세요!

  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삼국지연의에서 조조가 원술을 치는 대목에서 군량관을 죽이는 것과 비슷한 대목이로군요.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2006/10/23 23:17
    • 飛정상 2006/10/25 05:19  댓글주소  수정/삭제

      삼국지를 가장 마지막으로 읽었던 것이 고등학교 3학년 때였는데, 그 때까지만 해도 저는 조조를 무척이나 싫어했더랬습니다. 하지만 지금 다시 읽으면 어떻게 느껴질지 - 시간 나면 삼국지를 다시 읽어봐야겠습니다.

  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 유명한 어느 선생님의 첫사랑이 네가 아닌것을 슬퍼하고 있는게지? 그런게지! :P 헤헤헤
    나도 루소가 좋아. 그래서 그 유명한 선생님의 수업이 좋은걸지도 몰라 (!)

    2006/10/28 23:36
    • 飛정상 2006/10/30 00:01  댓글주소  수정/삭제

      안그래도 뒷풀이때 또 한번 그 유명한 어느 선생님과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찍고 왔다. 흐흐흐. 하도 정신이 없어서 니 문자랑 도원오빠 문자랑 기타등등 문자가 온것도 모르고 있었어. 그나저나 까칠했'던' 렛양, 잠은 잘 잤냐?

      난 아직 루소 좋은지 모르겠다. 별 재미가 없어. 역시 재미라면 마선생이지. 무지 재미있어 그 사람.

  5. 세희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서양근대정치사상 수업에서 루소를 읽는데, '어느 선생님'의 지적 첫사랑이 왜 루소인지 알 것 같다. 혹시 그 '어느 선생님'도 홉스-로크-칸트 순으로 읽어내려오다 루소에 도착한 것은 아니었을까?

    2006/11/13 21:32
    • 飛정상 2006/11/13 22: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마키아벨리-홉스-루소-칸트: 우리 마선생 빼먹지 마시라.

    • 세희 2006/12/18 02: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마선생님은 '유일한', '중세'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표현을 빌자면,)

      그나저나 '마'선생님들(마키아벨리, 맑스, 마광수)은 하나같이 흥미로운 듯.

    • 飛정상 2006/12/18 10:35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 그러고보니 그렇군. 이거 부끄러운걸.
      그나저나 조만간 정말 얼굴 한 번 보자구.

    • 세희 2006/12/19 11:57  댓글주소  수정/삭제

      엥? 뭐가 부끄러...

      암튼, 그럽시다. 정말루. (교환학생이나 이런걸로 훌쩍 떠나버리는 것은 아니겠지? 하도 주위에 그런 친구들이 많아서…)

    • 飛정상 2006/12/20 23:44  댓글주소  수정/삭제

      교환학생 신청하긴 했는데, 어떻게 될지 잘 모르겠다. 되면 좋은거고. 허허허. 그래도 금방 훌쩍 떠나진 않을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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